Wrestler Rewind<7>-10년이 지나도 떨쳐내지 못하는 이름, '오웬 하트' 레슬러 리와인드


10년이 지나도 떨쳐내지 못하는 이름, '오웬 하트'

2000년대에 들어 레슬매니아들은 몇 차례의 큰 아픔들을 겪었다. 4년 전 세상을 떠난 에디 게레로는 아직도 애잔하게 레슬매니아들의 가슴을 아프고 하고있고 그와 더불어 크리스 벤와라는 이름 또한 그림자처럼 기억에 떠오른다. 하지만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나에게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이름은 이들이 아닌 오웬 하트라는 이름이다. 1999년 5월 23일 캔자스시티에서 일어난 프로레슬링 사상 최고의 비극. 그리고 그 후 10년이 지나면서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 한 명의 레슬러. '현역 레슬러의 죽음'이라는 명제에서 내 기억 맨 윗줄에 있는 오웬 하트의 이야기이다.

 많은 레슬링 가문 중에서도 유독 많은 일류선수와 제자들을 양산한 하트가문. 오웬은 그 하트 가문의 둘째로 태어나 당연하게도 프로레슬러가 되었다. 하트의 명성에 걸맞게 그는 레슬링에 대한 천부적 센스가 있었고, 혹독한 훈련과 해외원정 등을 통해 실력과 경험을 두루 쌓아갔다. 거기에 잘 생긴 외모까지 더해 프로레슬러로서 이보다 좋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걸 갖춘 선수였다. 하지만 이러한 오웬에겐 최고의 자리가 허락되지 않았다. 바로 오웬보다 조금 더 카리스마 있고 조금 더 언변이 화려하고 조금 더 레슬링을 먼저 시작한 형, 브렛 하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빛난던 순간은 다름아닌 형과의 맞대결에서 핀폴을 따낸 레슬매니아 10이다

오웬은 언제나 잘하는 선수였지만 브렛은 언제나 최고였고, 오웬은 항상 박수를 받는 선수였지만 브렛은 항상 열정적인 환호를 받는 선수였다. 그가 있는 곳엔 항상 형이 있었고 그가 무엇을 하든 형의 큰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때문에 그는 형의 이름을 극복하기 위해 데뷔 초부터 가면을 쓰고 경기를 했고 항상 자신의 힘으로 정상에 서길 원했다. 하지만 블루 블레이저의 가면을 벗은 이후 그는 줄곳 형을 위시한 하트 파운데이션의 주변에서 맴돌았고 그로 인해 메인이벤트보단 태그팀 디비젼이나 유로피언 디비젼 등에 투입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기껏 얻은 싱글 각본들은 그저 자신보다 잘난 형에게 대드는 철없는 동생의 역할에 불과했다. 때문에 그가 가장 빛난던 순간은 다름아닌 형과의 맞대결에서 핀폴을 따낸 레슬매니아 10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 앞서나갈 것 같지 않았던 형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오웬. 적어도 당시의 오웬에게는 더 이상 거칠 것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세상은 동생의 승리보다 형의 패배에 더 주목했고 그 경기의 승패와는 하등의 관계 없이 브렛은 최고의 선수로서 WWF 링을 지배해갔고 동생과의 차이는 점점 커졌다. 마치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자신의 길을 걷는 셋쇼마루와 그런 형에게 맹목적으로 전의를 불태우는 이누야샤의 관계처럼, 두 형제는 멀어지고 있었다.

브렛 하트의 동생이라는 꼬리표만 떼면 완벽한 선수. 하지만 그런 전제는 형이 있는 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1997년의 몬트리올 스크류잡은 생각지도 못한 기회이기도 했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형인 브렛을 비롯한 하트의 일원들이 모두 wCw로 이적해버린 것이었다. 원인, 과정이야 어찌됐든 거대한 장벽이었던 브렛의 wCw 이적은 하트를 등지고 홀로 WWF에 남은 오웬으로 하여금 막힌 숨통을 트이게 했다. 이후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브렛 하트의 동생이 아닌 오웬 하트를 각인시키기위해 전력을 다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을 다시 쓰고 블루 블레이저를 다시 연기하기도 했고, 형의 원수라고도 할 수 있는 DX와의 각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게 1997년의 몬트리올 스크류잡은 생각지도 못한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브렛과 이미 한바탕을 치렀던 숀 마이클스의 입김이었는지, 시합 중 오웬이 기술로 목부상을 당한 오스틴의 영향이었는지, 아니면 그 때까지도 그를 브렛의 동생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팬들의 냉담한 시선때문이었는지 그는 좀처럼 위로 치고올라가지 못했다. 예전부터 기량은 절정이었지만 최고가 되지 못한 관성으로 그는 계속 제자리였고, 그 사이 한 수 아래로 평가됐던 더 락, 트리플H 등에게 추월당해 버렸다. 10년 가까이 브렛 하트의 동생만 보아온 냉담한 팬들에게 오웬 하트 개인은 도무지 익숙하지 않는 이름이었고, 아무도 그에게 최고라는 자리가 어울릴거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위를 향해 오르는데 자신만 정체되어있는 이러한 상황들은 그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고, 결국 오웬은 수만명의 관중이 모인 인유어하우스 PPV에서 과거 숀 마이클스가 했던 줄타기 등장신을 따라하다가 50피트 아래로 떨어져 그 삶을 접고 마는 최악의 결말을 짓고 말았다.

10년이 훨씬 넘는 프로레슬링 경력동안 고작 인터컨티넨탈챔프 2회, 유러피안챔프1회, 킹오브더링우승 1회가 싱글 커리어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었던 대접받지 못했던 그. 그러나 안타까운 죽음 이후에 마저도 오웬은 형을 이겨낼 수 없었다. 오웬이 죽은 후에도 브렛은 최고의 선수로서 명성을 쌓아갔고 오웬의 기일이 다가올 때마다 언론과 팬들의 주목을 받으며 행동 하나하나가 항상 레슬링 뉴스 기사의 단골소재가 되었다. 반면 오웬은 그의 기일이 다가와서야 사람들은 갑작스레 그를 추억하며 얼마 있지도 않은 기억들을 꺼내느라 애를 먹곤 했다. 나 또한 오웬이 기일이 다가옴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야 이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고작 인터컨티넨탈챔프 2회, 유러피안챔프1회, 킹오브더링우승 1회가 그의 커리어의 전부였다.

최고의 기량을 뽐내던 현역 레슬러의 죽음이라는 점에서 에디, 벤와와 오웬은 상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에디의 경우 젊은 시절의 방종에 대한 대가로 심장의 수명을 갉아먹은 상태에서의 어쩌면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로 떠나보내고 벤와의 경우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 스스로에 대한 모멸과 자책으로 마지막 선택을 한 것에 대해 한숨과 비난으로 외면하고 떼어낼 수 있었지만 오웬의 경우는 그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이 죽음이라는 현실만 막연하게 남겨졌고 미처 받아들이고 이해할 새도 없이 그저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가 어째서 죽어야 했는지에 대해 그 누구도 납득하지 못했다. 당시의 무대장치나 기술팀의 과오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왜 하필 그토록 팍팍하고 누구보다 고단한 삶을 산 선수에게 그런 인정할 수 없는 죽음이 닥쳤는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고인이 된 지 4년이 지난 지금, 굳이 그의 명경기를 찾아보고 경력을 다시 뒤져보아야 그의 대단함을 추억할 수 있을 정도로 빛바래가고 있는 에디 게레로와 달리 나에게 오웬의 기억은 그가 떠난 지 10년이 지나도록 레슬매니아 10에서의 승리의 순간과 함께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아마 모든 것을 이루고 인정받고 박수치며 떠나보낼 수 있었던 에디와 달리 끝까지 자신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아쉬움만 남긴 채 너무나도 갑작스레 숨을 거둔 오웬의 차이일 것이다.    

항상 최고였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떠나버린 프로레슬러. 심지어 지금까지도 브렛 하트의 동생으로, 혹은 오스틴의 목을 부러뜨린 레슬러로만 기억되고 있는 선수. 그의 못다이룬 꿈과 인정받지 못했던 삶이 마치 내 잘못인 것만 같아 차마 크게 부르지도 못하고 미안한 마음에 나지막이 되뇌이게 만드는 이름. 오웬 하트-


Owen Hart
(1966~1999)

사진출처 : http://onlineworldofwrestling.com/


Wrestler Rewind<8>-스팅


덧글

  • 산체 2010/04/15 23:06 # 답글

    떠난 뒤에야 그가 얼마나 위대한 레슬러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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